조선시대에 대제학을 지낸 조말생(趙末生)을 비롯하여 이조판서를 지낸 조극관(趙克寬), 관찰사를 지낸 조수양(趙遂良), 공조판서를 역임한 조언수(趙彦秀), 좌삼찬(左參贊)의 조사수(趙士秀) 등 많은 관직자들을 배출하면서 가문의 기틀을 세웠다. 선조 때에 조정(趙挺)이 우의정에 오르고 조존성(趙存性)이 호조판서를 지내면서부터 가문은 더욱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조창원(趙昌遠)은 진사시에 합격, 의금부도사를 거쳐 인천부사를 지낼 때 딸이 인조의 계비(繼妃)가 되자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에 봉해지고 돈녕부사(敦寧府事)가 되었다.
조계원(趙啓遠)은 1628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조사석(趙師錫)은 1688년 좌의정, 조태채(趙泰采)는 1717년 우의정을 지냈다.
조태구는 168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고, 조태억(趙泰億)은 1702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호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을 지냈다. 그리고 순조 때의 조두순(趙斗淳)은 1826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삼정 개혁을 단행, 1865년 영의정에 올라 삼군부(三軍府)를 부활시켰다.
철종 때의 조병세(趙秉世)는 185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을 지냈다. 그는 1896년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의해 시무19조를 상소하였고, 을사오적의 처형과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했으나 일본군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못하자 자결하였다. 그에게는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