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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성씨의 시조와 본관 유래를 한 번에 확인

임천조씨(林川趙氏)

유래

시조 : 조천혁(趙天赫)

시조 조천혁(趙天赫)은 송나라 태조 조광유의 손자인 기왕(冀王) 조유길(趙惟吉)의 다섯째 아들이라 한다.

그는 송나라에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서두공봉관(西頭供奉官)이 되었으나 979 년에 위왕(魏王)이 화를 당하므로 숙부 조유고(趙惟固)와 함께 화를 피해 우리나라로 들어와서 천혁(天赫)으로 이름을 바꾸고 임천에 정착하여 살았다. 그후 고려 현종 때 강감찬(姜邯贊)과 함께 글란군(契丹軍)을 대파하여 공을 세웠으므로 가림백(嘉林伯 : 가림은 임천의 옛 이름)에 봉해지고 문하시중평장사에 올랐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임천으로 하고 있다.

-묘소는 충남 부여군 장엄면 상황리에 있고, 매년 10월 10과 13일에 향사한다.

인물

조선시대에 감찰을 지낸 조찬(趙瓚)을 비롯하여 사성(司成)을 지낸 조원경(趙元卿), 시조의 10대손으로 보덕(輔德)을 지낸 조지서(趙之瑞), 군자감정을 지낸 조익(趙翊), 도사(都事)의 조응공(趙應恭) 승지의 조원(趙瑗) 등 여러 관직자를 배출하면서 가문의 번성기를 맞이하였다.

또, 3대가 모두 시문(詩文)으로 이름을 떨친 조원(趙瑗), 조희일(趙希逸), 조석형(趙錫馨)이 있다.

조원은 선조 때 정언(正言)이 되어 당쟁의 폐해를 상소하였으며, 뒤에는 승지에 이르렀고 "독서강의(讀書講疑)" 등의 저서가 있다.

조희일은 160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감찰을 거쳐 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으며 서화와 시문에 능하여 "죽음집(竹陰集)" 등을 남겼다.

조석형은 인조 때 진사시(進士試)에 1등으로 합격하였으나 일체의 벼슬을 거부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특히 당시(唐詩)에 정통하였다.

조선 선조 때의 조희철(趙希哲)은 도사(都事)를 지냈는데 임진왜란 때 그의 형 조희정(趙希正)과 함께 순절하자 조정에서 이를 표창하고 삼강록에 책록케 하였으며 쌍정여문(雙旌閭門)을 세우게 하였다.

조희진(趙希進)은 부사를 역임하였으며 조원기(趙遠期)는 166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삼사(三司)의 벼슬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조세환(趙世煥)은 19세 때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1637년 삼전도(三田渡)의 굴욕과 1644년 명제(明帝)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에서 농사에 종사했다. 1657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통정대부에 올라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사재로 빈민을 구제하고 송상현의 사당을 수축하는등 선정을 베풀어 왕으로 부터 말과 금품을 하사받고 전라도 관찰사, 승지 등을 역임했다.

영조 때의 조명정(趙明鼎)은 1740년 정시문과에 갑과로 급제,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이조판서를 지냈고 조정만(趙正萬)은 형조판서를 지냈는데 경사백가에 정통했으며 시문과 서예에도 뛰어났다.

그 밖에, 한문소설 "창선감의록(彰善感義錄)"의 저자로 알려진 조성기(趙聖期), 흥선대원군의 사위로서 공조와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일본정부가 준 남작(男爵)의 작위를 거절한 조경호(趙慶鎬) , 의정(議政)을 지낸 조병호(趙秉鎬) 등이 있다.

인구수

1985년 조사
10,448명
2,511가구
2000년 조사
11,040명
3,476가구
2015년 조사
14,25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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