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 조지수(趙之壽)
시조 조지수(趙之壽)는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왔으나 연대는 알 수 없고, 고려 중엽에 조순대부 첨의중서사(朝順大夫 僉議中書事)를 지냈다. 그후 후손들이 조선 개국 때 한성(현재의 서울)으로 옮겨 가세가 크게 번영하였고,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으므로 본관을 한양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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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 조지수(趙之壽)
시조 조지수(趙之壽)는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왔으나 연대는 알 수 없고, 고려 중엽에 조순대부 첨의중서사(朝順大夫 僉議中書事)를 지냈다. 그후 후손들이 조선 개국 때 한성(현재의 서울)으로 옮겨 가세가 크게 번영하였고,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으므로 본관을 한양으로 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시조 조지수의 외아들로 고려 고종 45년(1258) 원(몽고)의 쌍성총관부 초대쌍성총관을 지낸 조휘(趙暉), 조휘의 아들로 13세의 나이로 제2대 총관이 되고 부원수를 지낸 조양기(趙良琪), 공부상서와 예의판서를 역임하고 삼중대광 용성군에 이른 조돈(趙暾), 판의덕부사를 지낸 조인벽(趙仁璧) 등의 인물이 있었고,
조선시대에 이조판서를 지낸 조인옥(趙仁沃), 개국공신 한천부원군 양절공 조온(趙溫)과 한평부원군 양경공 조연(趙涓)등 많은 관직자를 배출하면서 가문의 기틀을 세웠다.
중종 때에 조광조는 일찌기 김굉필에게 수학하고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영유가 되었다. 1515년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여씨향약을 실시케 하고 소격서를 폐지하는 등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훈구파의 반발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조병옥은 1909년 평양숭실학교를 졸업하고 콜럼비아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는 1929년 광주학생운동사건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왜경에게 체포되어 3년간 복역하였고,1937년 수양동지회사건으로 다시 2연간 복역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노선을 비판하며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나섰으며 1960년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에 입후보 했으나 병사하고 말았다. 그에게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청록파 시인 중의 한 사람인 조지훈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