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조 도순(都順)의 아들 도충박(都忠朴)이 전리상서(典理尙書)를 역임했고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낸 도유도(都有道)와, 종부시 판사(宗簿寺判事)에 추증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진 도유덕(都有德)을 아들로 두어 이들이 성주도씨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다.
특히 도순(都順)의 현손(玄孫)인 도홍정(都洪正)은 고려 말에 도씨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인물(人物)로서, 동양창 판관(東陽倉判官)을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되고 칠곡부원군(漆谷府院君)에 봉해진 도효안(都孝安)의 세째 아들로 출생하여 공민왕 때 벽상공신(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보국 문하시중(三重大匡輔國門下侍中)에 오르고 칠곡부원군(漆谷府院君)에 봉해져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 그의 아들 도길부(都吉敷)도 우왕때 이성계(李成桂)의 부장(副將)으로 충청과 전라도(全羅道)에 침입한 왜구를 황산(荒山)과 운봉(雲峰)에서 격퇴시켜 대광보국숭록대부로 문하첨의찬성사(門下僉議贊成事)에 오르고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봉해졌으나 1388년(우왕 14) 1월에 일어난 이인임(李仁任)의 축출사건에 연루되어 화(禍)를 당했다.
한편 두문동(杜門洞) 72현의 중심인물인 도응(都膺)은 문하첨의찬성사(門下僉議贊成事)를 지냈으나 기사화변(己巳禍變)으로 아버지가 화를 당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홍주의 노은동 (魯隱洞)에 은거하였는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창업하고 왕위에 오른 후 어릴적 친구인 그에게 옛 정을 못잊어 다섯 차례나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끝까지 거절하고 고려의 산하임을 고집하여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절의에 감복한 태조는 청송당(靑松堂)이란 호를 내려 치하했고, 운천서원(雲川書院)과 경양사(景良祠)에 제향되었다.
봉차령(奉車令) 도천우(都千遇)의 아들 도흥(都興)은 공민왕 때 무신으로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벼슬은 상원수(上元帥)에 올랐고, 충신 정몽주(鄭夢周)가 선죽교에서 이방원(李芳遠)에게 피살되자 그의 일파로 몰려 유배되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중종때 효행(孝行)으로 유명했던 도형(都衡)이 현량과(賢良科)에 올라 호조(戶曹)와 병조(兵曹)의 좌랑(佐郞)을 지냈으나 조광조(趙光祖)와 교류했다는 이유로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파직당한 후 향리에서 학문으로 여생을 마쳤으며, 순조때 효자명정(孝子命旌)으로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에 공을 세운 도응유(都應兪)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소모장(召募將)으로 활약했으며, 오현예설(五賢禮說)을 편찬했다. 그의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도성유(都聖兪)와 평양서윤(平壤庶尹) 도경유(都慶兪)가 유명했으며, 도신수(都愼修)는 함흥 부사(咸興府使)로 선정을 베풀어 대구의 용호서원(龍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성리학(性理學)으로 유림(儒林)의 존망을 받았던 도신징(都愼徵)은 1674년(현종 15) 인선왕후(효종의 비)가 별세하여 자의대비(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일어나자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했고 주부(主簿)를 거쳐 용궁 현감(龍宮縣監)으로 나가 많은 치적(治績)을 쌓아, 보성군수(寶城郡守)를 지낸 도영성(都永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역임한 도석훈(都錫壎), 한성우윤(漢城右尹) 도원결(都元結)과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