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부의 아들 7형제 대(代)에서 가세(家勢)가 크게 융성하여 가장 화려한 인맥을 이루었다.
세종의 장인이면서도 상왕(上王)인 태종의 비위에 거슬려 끝내 왕명으로 죽음을 당했던 온(溫)은 청성군 덕부의 다섯째 아들이다.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한 뒤 병권(兵權)만을 장악하고 있었다. 온의 막내 아우인 청이 군국(軍國)의 대사를 상왕이 쥐고 흔드는 것을 부당하다고 병조 판서(兵曹判書) 박습(朴習)에게 불평한 것이 상왕의 위에 들어가 옥사가 일어났다.
죽음에 임하여 온은 고 유언하였다. 그후 심씨는 대대로 그 유언을 지켜 박씨와 혼인을 논하지 않다가 온의 현손(玄孫) 의(祥)와 융(隆)이 박씨와 혼인했는데 후손에 아들이 없거나 자손이 융성하지 못했다고 한다.
동지돈령부사 봉원의 손자 희수(喜壽)는 선조 말에 이조 판서(吏曹判書)와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 좌·우찬성(左·右贊成)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한 후 권신 이이첨의 전횡이 심해지자 병을 핑계로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우의정(右議政)에 전임되어, 1614년(광해군 6) 영창대군의 신원을 상소했다가 사형을 당하게 된 정온을 구하여 유배에 그치게 하는 등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특히 그는 상신의 벼슬을 지내면서도 허물어져 가는 집 한 채밖에 없어서 임금이 대궐의 말 한 마리를 보내어 팔아서 집을 고치라고 시켰을 만큼 가난하게 살았으며, 만년에 둔지산(屯之山)에 들어가 시로써 여생을 보냈다.
그밖의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용맹을 떨쳤던 우정(友正)의 아들 현이 인조 때 여러 군현의 수령을 지내고 돈령부도정(敦零府都正)에 이르러 병자호란 이 일어나자 종사(宗社)를 따라 강화에 피난가서 청병(淸兵)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가묘(家廟)의 위패(位牌)를 땅에 묻은 후 국난의 비운을 통탕하는 유서를 쓰고 부부가 함께 자결했다.
역사상 이들 부부처럼 태연하고 절도 있는 죽음은 없었다고 하는데, 그때 부부의 나이가 70세였다. 조카 심동구(沈東龜)가 배를 대놓고 피난할 것을 발을 구르며 재촉하고 있는데 현은 애써 돌려보내고 조복을 입은 다음 동향사백을 하고 임금에게 올리는 유서를 지었다.
로 시작된 이 글의 내용은 임금에 대한 보은의 죽음을 전하는 내용이었다.
그 유서를 외손자 박장원(朴長遠)에게 주어 배를 태워 보낸 다음 부인 송씨를 돌아보며 하며 함께 죽을 것을 권유하자, 송씨는 하고 말했다.
이들 부부는 서로 마주보며 목을 매었는데, 서로의 어깨를 짚고 편안히 운명에 종용한 모습으로 죽어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