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의 손자 이영기(李英奇)는 1366년(고려 공민왕 1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구원(邱園)으로 퇴거하였는데 태조가 여러번 벼슬을 내렸으나 끝내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4세손 이로(李擄)는 1453년(단종 1년) 계유정란에 공을 세워 세조 때에 정난원종공신에 책록되었고, 벼슬은 길주목사에 이르렀다.
6세손 이만균(李萬鈞)은 1501년(연산군 7년) 성균생원(成均生員)에 합격하고, 1522년(중종 17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534년 옥천군수, 청주진관 겸 병마절제사(淸州鎭管兼兵馬節制使)를 역임하면서 치적이 많아 왕의 은전이 있었다.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겸 경정참찬관(參贊官), 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을 지내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되었고, 경학과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사경(李思敬)은 어려서부터 학문과 행의로 다른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고 성품이 고결하여 의병장조헌(趙憲)과 교의가 깊었다.
이상기는 효성이 지극하여 1871년에 유림에서 천거하여 효행에 대한 포상이 있었다. 그후 1881년 유생과 같이 만인소(萬人疏)를 올려 척사(斥邪)를 논하였다.
구한말에 이봉수(李鳳洙)는 1903년 미국으로 건너가 대한인동지회와 조국광복동지회의 회원으로서 미국에서의 인구등록과 독립운동에 필요한 원조금을 모금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