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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성씨의 시조와 본관 유래를 한 번에 확인

학성이씨(鶴城李氏)

유래

시조 : 이예(李藝)

시조 이예(李藝)는 고려말에 새왕조가 들어서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낙향, 지금의 울산에 터를 잡아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지냈다. 그러나 20여년이 지나 세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그는 생각을고쳤다.

당시 울산은 왜구의 침입을 자주받아 민심이 흉흉하고 백성들의 괴로움이컸다. 이웃의 괴로움을 덜고자 통신사로 나선 그는 왜와의 40여차례에 걸친 왕래외교에서 맹활약했다. 그공으로 세종 3년 조정으로부터 충숙공의 시호와 함께 공패를 하사받았다. 그는 또한 무기개발에도 업적을 남긴 발명가였으나 그는 벼슬보다 선비로서 조용히 살것을 후손들에게 유언했다.

인물

조선시대에 임진왜란때 6의사를 배출해 충의의 가문으로 더욱 빛난다.

이경연(李景淵)은 임진왜란이 나자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정유재란때는 곽재우와 함께 경남창녕의 화왕산성 전투에 참가 큰공을 세워 경성판관에 임명되었다.

이인상(李仁常) 역시 향리에서 의병을 일으켜 수많은 전투에서 왜적과 분전하여 공을 세우고 도산싸움에서 장렬히 전사했으며,

이겸수(李謙受), 이겸익(李謙益)형제는 당시 서생포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의 정세탐정에 큰공을 거두어 이겸수는 정주판관을 제수받았고 이겸익은 현종때 한성부 우윤(右尹)을 지냈다.

이봉수(李鳳壽)는 빛나는 전공을 세우고 진중에서 순국하여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으로 녹봉되었다.

조선 현종때의 대문장가 이동영은 국난에 전공을 세워 관직을 받고도 이를 사양하고, 초야에 묻혀 자연과 함께 노닐었던 할아버지 이한남의 뜻을 기려 현종 3년 봄 태화강변에 이휴정을 지었다.

학성이씨는 이외에도 이양오(李養吾), 이관오(李觀吾)형제와 이준민(李俊民)같은 문장가들을 배출하여 가문의 명성을 이어왔다.

인구수

1985년 조사
18,869명
4,625가구
2000년 조사
20,964명
6,615가구
2015년 조사
16,46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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