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철(조선 무관) : 1618년(광해군10) 명나라가 건주위를 정벌하기 위해 우리 나라에 원병을 청해 왔을 때 좌영장 김응하의 선봉으로 출전하여 포로가 되었다가 1625년(인조3) 탈출하여 명나라 등주에서 살다가 1631년 진가사의 선편으로 귀국했다. 1640년(인조18) 청나라가 개주를 공략하기 위해 우리 나라에 원병을 청해오자 중국어에 능통했으므로 상장 임경업 휘하에서 수군 5천명과 함께 참전했으나 다시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되어 귀국했다. 1658년 조정에서 자모산성을 지킬 군사를 모집할 때 60세의 고령으로 뽑혀 20여년 동안 성을 지켰다.
- 김응향(조선 자:달부 관직:도사) : 1660년(현종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도사를 지냈다.
- 김익헌(조선 자:니장 관직:군수) : 1726년(영조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군수에 이르렀다.
- 김우석(金禹錫, 10세손) :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자모산성(慈母山城)에 들어갔다가 인조가 굴욕적인 강화(江華)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후세의 충신들에게 좌우명이 되었던 척화(斥和)의 시를 자모산 성문에 써 붙이고 통곡하였다. 청나라 장군이 척화시 아래 통곡하고 있는 김우석(金禹錫)의 목을 치려하자 그는 꿈적도 않고 앉아 있었으며 그의 열 살된 아들 김응원(金應元)이 아버지를 끌어안고 함께 우니 청나라 장군도 감동하여 죽이지 못했다고 한다. 인조는 김우석(金禹錫)의 충절을 기려 정표(旌表)를 내렸고, 그의 아들 김응원(金應元)은 가장 어린 나이로 효의 정표를 받은 것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